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로오카 타츠로 (문단 편집) == 현역 시절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75px-Weeklybaseball_1958_04_16_(Hirooka).jpg]] 1954년,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이 지휘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면서 현역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긴테츠 펄스]], [[니시테츠 라이온즈]], [[한신 타이거스|오사카 타이거스]], [[난카이 호크스]], [[치바 롯데 마린즈|마이니치 오리온즈]]의 수많은 구단에서 영입 제안을 받았으나 결국 요미우리에 입단했다.][* 히로오카는 '''“나의 야구의 원점은 교진군의 야구이다. 내가 프로의 엄격함을, 아니라고 하는 만큼 생각해서 알게 된 입단 당시 교진군의 야구이다”''' 라고 후에 말했다.] 첫 시즌인 1954년부터 당시 주전 유격수였던 [[히라이 사부로]]로부터 주전 자리를 빼앗아 활약. '''112시합에 출장해 107안타, 타율 .314, 15홈런, 67타점, 9도루'''을 기록하여 [[신인왕]]을 차지함과 동시에 [[베스트 나인]]에도 선정되었다. 이후 [[한신 타이거스|오사카 타이거스]]의 [[요시다 요시오]]와 함께 [[센트럴 리그]]를 대표하는 간판 [[유격수]]로 활약하며, 특히 수비의 견실함과 화려함을 무기로 요시다와 서로 경쟁했다. 타격면에서는 프로 1년차 외에는 낮은 타율을 기록하는 시즌이 많았는데 반면 통산 117홈런을 기록함과 동시에 1958년에는 오른쪽 무릎 부상으로 2개월간 결장했지만 복귀 이후에는 18개의 홈런을 때려내는 등의 펀치력도 있었다. 1961년, [[카와카미 테츠하루]]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히로오카는 [[플레잉 코치]]로 발탁되었으나, 선수 때부터 [[수비]] 문제로 서로 다퉜던 두 사람의 관계는 쉽게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1964년 8월 6일에 열린 [[야쿠르트 스왈로즈|고쿠테츠 스왈로즈]]와의 경기는 시한폭탄 같았던 이들의 관계에 결정타를 먹인 계기가 되었다. 0:2로 뒤진 7회초 1사 3루 상황에서 히로오카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 3루에 있던 [[나가시마 시게오]]가 독단적으로 홈스틸을 강행했다가 아웃당했는데, 이해하기 힘든 본헤드 플레이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더그아웃]]에서는 딱히 별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다. 이에 히로오카는 벤치가 자신을 허수아비 취급해서 홈스틸을 지시한 것이라 지레짐작했고, 격분한 나머지 배트를 땅바닥에 내팽개치며 '''“나의 배팅을 그렇게 못 믿는 겁니까!”'''라고 외친 뒤 그대로 구장을 떠나버렸다. 같은 해 카와카미는 시즌 종료 후 히로오카의 [[트레이드]] 형태의 방출을 획책했지만[* 카와카미는 [[라이벌]]이었던 [[요나미네 카나메]]도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트레이드]]로 [[교진군]]에서 방출시킨 바가 있었다.] 히로오카는 차라리 은퇴를 하겠다는 각오로 구단주인 [[쇼리키 마츠타로]]에게 직접 '''“트레이드되느니 요미우리의 히로오카로서 끝내게 해달라”'''고 말한다. 결국 쇼리키의 지시로 요미우리 잔류가 결정되었지만(카와카미는 스포츠 매체들로부터 집중 공격을 당했다) 다음 시즌부터 타석에 들어설 기회가 줄어드는 등 악재가 겹쳤다. 카와카미는 히로오카의 재능만큼은 높이 평가했으나, 1966년 히로오카가 [[주간 베이스볼]]에 의견기사를 기고하면서 '''"선수의 본분을 알지 못하겠다"'''라며 카와카미를 비난했고, 대소동 끝에 1966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이 시점에서 카와카미와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3시즌간의 통산 성적은 '''1327시합 출장 1081안타 117홈런 465타점 115도루 타율 .240''' 은퇴 후 라디오 간토, 산케이 스포츠 등에서 평론가로 활동했고 현역 은퇴 직후인 1967년 2월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스프링 캠프의 시찰을 위해 [[미국]]으로 가기도 했다. 이때 [[플로리다]]에 있는 요미우리의 스프링 캠프도 방문했지만 카와카미는 히로오카의 취재를 허락하지 않았고, 선수들에게도 '''“히로오카의 말을 듣지 말아라”'''라고 지시를 내렸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히로오카의 숙박도 허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카와카미의 처사에 대해 히로오카는 격노하면서 문자 그대로 '''[[살의]]'''를 품을 정도의 격한 분노를 느꼈다고 후에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모리 마사아키|모리 마사히코]](후의 '''모리 마사아키''')만이 히로오카가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가 식사를 같이 하면서 그를 위로했고 히로오카는 모리에게 깊이 감사하면서 이후 지도자 시절 모리와 행동을 함께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